웅~//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서간 나눔//2011.11.11//
디트리히 본회퍼는 반나치 저항운동에 가담하여 히틀러의 독재정권과 싸우다가 1943년 4월 5일 게슈타포(비밀국가경찰)에 의해서 체포되었다. 1945년 4월 9일, 그러니까 히틀러의 제3제국이 무너지기 직전 플로센뷔르크(바이에른) 강제 수용소에서 게슈타포 장관의 직접 명령으로 39세를 일기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 청년 신학자이다.1)
10년 후
함께 괴로워하는 것
: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려면, 우리가 자유롭게 시간을 포착하고 위험과 맞서는 책임 있는 행위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의 풍성함에 동참하여야 하며, 불안에서가 아니라 자유함을 주고 죄를 사하여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모든 수고하는 자에게 넘쳐 흐르는 참된 동정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마음의 풍성하심에 동참하여야 한다.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 기대와 우둔한 방관은 결코 기독교적인 태도가 아니다. 행위와 동정 속으로 기독교인을 부르는 것은 먼저 자신의 체험에서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신 형제들의 체험에서이다.2)
양친께 드리는 편지
저는 말의 기적의 기이한 이야기에 정말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각자의 자기의 말만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이해할 수 없게 되는 바벨탑의 분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종언을 고하고 극복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이 하나님의 말씀은 각 사람이 이를 이해하며 그 말씀을 통해 비로소 다시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교회는 그러한 것이 일어나는 장소여야 한다는 것, 어쨌든 이것은 모두 매우 크고 중요한 생각들입니다.3)
어떤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청징(淸澄)스러움’(hilaritas)
나는 그것을 자기의 일에 대한 확신, 이 세계와 통속적인 판단의 대담성과 요구이며, 세상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지라도 자기의 일에서 무언가 선한 것을 이 세상에 보여주려고 하는 굳은 확신, 곧 의기양양한 자신이라고 말하고 싶네.4)
차라리 자기의 한정된 사명과 가능성을 보다 명확하게, 보다 냉정하게 파악하고, 그것에 의해서 이웃에 대한 현실적인 사랑을 가능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믿고 있네. 공상이 자극되고 극도로 도발되는 한 이웃에 대한 사랑은 아무 막연하고 일반적인 것에 머무를 걸세. 현재 나는 인간과 그의 곤궁과 궁핍을 보다 냉정하게 응시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전보다 더 잘 봉사할 수 있다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무감각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명하게 하는 것이라네.5)
오늘,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존재방식에 있어서만 성립할 것이다. 즉 기도하는 것과 인간 사이에서 정의를 행하는 것이 그것이다.… … 그것은 새로운 의와 진리의 말이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평화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말일 것이다. “…그들은…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렘 33:9) 그때까지는 기독교인이 행하는 일은 조용하고 숨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도하고 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너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되기 바란다. 언젠가 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줄 날이 있기를 바란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 4:18)6)
예수는 겟세마네에서 “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인간이 신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과는 전면적으로 반대의 것이 아닐까. 인간은 신을 상실한 세계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라네.
따라서 인간은 사실 신을 상실한 세계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되고, 이 세계의 무신성을 어떤 방법을 써서 종교적으로 은폐하거나 신성화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네. 그는 ‘세속적으로’살지 않으면 안되고, 바로 거기서 신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으면 안되네. 그는 ‘세속적으로’사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네. 다시 말하면 그는 그릇된 종교적 속박이거나 장해로부터 해방되어 있는 것이지. 기독교인이란 것은 일정한 양식에 있어서 종교적이거나 어떤 방법론에 근거해서 무언가로(죄인이라든가, 회개한 자든다, 성도라든가 하는 것으로) 자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네.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서 하나의 인간유형이 아니라 인간을 만든다는 속에서 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이지.
이것이 바로 ‘회개’인 것이라네. 그것은 자기 자신의 곤궁이나 문제나 죄나 불안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 메시아적 사건에 자기도 들어가서 그렇게 함으로써 이사야 53장이 성취되는 것이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요한복음에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과 관련되어 있다네(덧붙여 말해두지만, 예레미아스(A.Jeremias)는 최근 ‘어린양’을 아람어로 ‘종’으로 번역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사야 53장과 관련시켜 생각하면 정말 멋진 생각이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의 신의 메시아적 고난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신약성서 속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어나고 있다네. 제자들을 복종으로 부르시는 것을 통해서, 죄인과 더불어 식탁을 함께하시는 일을 통해서, 말의 좁은 의미에 있어서의 ‘회심’을 통해서(삭개오), 큰 죄가 있는 여자의 행위(아무런 죄의 고백도 없이 행해진)을 통해서(눅 7장), 병든 자의 고치심을 통해서(위 참조, 마 8: 17), 어린아이를 받아들이심을 통해서 말일세. 목자들이 동방박사들과 함께 말구유 옆에 서 있는 것은 ‘회심한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단순한 그들이 단순하게 말구유에 끌렸기 때문이라네(별). 전혀 죄를 고백하지 않은 가버나움이 백부장이 신앙의 모범으로서 예거되고 있지(‘야이로’를 참조) 부유한 청년을 예수는 ‘사랑’하신다네. 내시(행 8장)와 고넬료(행 10장)는 심연 속에서 허덕이는 존재와는 전혀 별개의 사람이고, 나다나엘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네(요 1:47) 마지막으로 아리마대 요셉과 무덤 가의 여인들이 있네.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유일의 것은 그리스도에서의 신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네.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신앙인 것이라네.7)
나눔
1. 함께 괴로워해본 적이 있는가?
동정이나 연민이라는 감정적 차원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누어 보려했던 적이 있는가?
행동을 수반하는 사랑을 해본 적이 있는가?
2.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 교회라고 하는데, 당신은 교회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잣대(선입견)로 사람들을 평가해 본 적이 있는가?
그 또는 그녀를 나와는 너무나 다른 사람으로 여겨 그 또는 그녀의 삶에 무관심으로 대하려고 했던 적이 있는가?
3. 청징스러움, 이 세상에 선한 것을 보이려는 굳은 확신이 있는가?
선한 것은 무엇인가?
4. 이웃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5. 본회퍼는 기도와 정의를 기독교인의 존재방식이라고 규정했다. 기독교인의 존재방식은?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기독교인이 지켜야 할 덕목은 무엇인가?
6. 신앙은 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한 본회퍼의 의견에 당신은 동의하는가?
당신의 생각하는 신앙이란?
하나님은 당신을 언제, 어디로 부르시는가?
최근 덧글